- 이 글은 2021년 10월 20일에 작성되어 2021년 10월 23일에 동물권적 관점이 친구의 조언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조언해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저의 영업에 넘어와 영화를 함께 보고 야밤에 열띤 이야기를 나눠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이 글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시청하실 예정이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저는 불완전하고 당신의 불완전함을 사랑합니다.
- 동물해방! 여성해방! 퀴어해방! 투쟁! 투쟁! 단결 투쟁!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가 없이는 죽고 못살 것 같던 존재들이 어느새 뿔뿔히 흩어져 다른 길로 걸어간다. 서로와 서로 사이의 거리와 간격이 서서히 멀어진다. 지영, 태희, 혜주, 비류, 온조 5명의 여성은 인천의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이다. 지영과 태희, 비류, 온조는 여전히 인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혜주만이 인천에 살다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집이 사라지면서 서울로 주거지를 옮긴다. 혜주의 부모는 유리창을 깨뜨리며 부부싸움을 한다. 작중에서 정확히 묘사되지 않았지만, 아마 그건 부부싸움보다는 가정폭력에 가까울 것이다. 가정폭력이 시작되면 혜주는 집을 나가 추운 거리로 나선다. 집을 나선 혜주가 마주한 것은 창문이 다 깨진 낡고 먼지쌓인 자동차이다. 이는 혜주의 가족, 그리고 혜주 가족의 경제적 계급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혜주는 가정폭력으로 창문이 깨진 집과 창문이 다 깨진 낡고 오래된 자동차가 있는 세계로부터 탈주하여 서울로 향한다. 아메리칸드림처럼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드림을 한 것이다.
혜주는 정상상에 자신의 몸을 맞춰가는 존재이다. 정상성에 편입하고 안착하는 것이 혜주의 생존전략이다. 혜주는 상고 졸업 후 바로 증권사에 사무직원으로 취직하여 직장에서 인쇄, 전화받는 업무, 회의 서류 준비 등 각종 사무업무 잡일을 맞는다. 이 회사조차도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있다. 대학 학위를 가진 사람은 회사의 중요한 업무를 맡고 다음 직급으로 승진도 할 수 있지만, 혜주와 같은 고졸 여성은 대졸 직원들의 커피 심부름, 업무 보조, 회의 서류 인쇄 등과 같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업무만 주어진다. 혜주는 흔히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이백충’(충을 비하적인 의미로 쓰는 것은 동물혐오, 곤충혐오적 표현이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혼자 사는 혜주는 고시원을 개조한 좁은 원룸에서 살아간다. 여성1인가구의 수입으로 서울에서 임대할 수 있는 집은 그런 집이 고작이다. 상사인 팀장의 자리에 혜주가 앉는 모습을 스크린에 비춰주면서 그가 지닌 계급상승의 욕망을 보여준다. 혜주는 대졸 남성 상사와의 연애를 통해 계급상승을 꿈꾸지만, 대졸 남성 상사는 새로 들어온 대졸 신입 여성 직원들을 더 반긴다. 혜주가 회사의 막내였을 때 쏟아지던 대졸 남성 직원의 관심은 새로운 신입 여성 직원들이 들어오자마자 그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혜주는 혜주가 아니라, ‘어리고 젊고, 예쁜 여성직원’인 것이다. 혜주의 단짝친구 지영은 혜주의 생일날 자신이 돌보던 길고양이를 혜주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며칠 뒤 혜주는 지금의 집에서는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며 지영에게 고양이를 돌려준다.(친구 생일선물로 비인간동물을 선물하지 마라 인간들아. 예술작품의 도구로 비인간동물을 동원하지 마라 인간들아)
지영은 엄마, 아빠가 없으며 천장이 점점 무너져내려가는 무허가 판자촌 집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천장의 부스러기를 쓸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다. 혜주가 집주인에게 전화해 집의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고쳐달라고 하지만, 집주인은 그러면 이참에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지영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병상에 누워있는 아픈 할아버지의 이부자리를 천장의 돌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는 쪽으로 옮기는 것 뿐이다. 지영의 방은 무허가 판자촌 집 2층에 있다. 지영은 공장에서 일하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일하던 공장이 망하면서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된다. 공장이 망하는 통에 지영은 일한 임금도 지급받지 못한다. 지영은 친구들에게 빌린 돈으로 근근히 연명한다. ‘지영이 니 돈 절대 안갚을걸?’ 혜주는 지영에게 여러번 돈을 빌려줬지만, 한번도 빌려준 돈을 받지 못했다며, 지영에게 돈을 빌려주는 태희를 말린다.
서울로 탈주한 혜주에겐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볼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지영은 태희에게 빌린 돈으로 무너져 내리는 집을 고치려고 했으나, 돈이 한참 모자라서 빌린 돈으로 새 핸드폰을 산다. 지영의 옛날 폰은 무전기처럼 생겼다. 아마 10년은 족히 썼겠지. 지영의 할머니는 이가 없어 깎두기를 사탕처럼 쪽쪽 빨아먹는다. 살 곳이 없어서 천장이 무너지는 집에서 사는 이들에게 임플란트를 하거나, 틀니를 할 돈이 있을리 만무하다. 지영이 천장이 무너지지 않는 집으로 이사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회사의 면접을 본다. 회사의 면접관이 묻는다. 컴퓨터를 할 수 있는지, 운전을 할 수 있는지. 지영의 집에 컴퓨터도, 차도 없는데 지영은 컴퓨터도 운전도 못한다. 그러자 면접관은 지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경리직 뿐인데 경리를 하려면 직계가족인 부모님의 신원보호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지영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둘이 산다. 지영은 경리직을 할 수 없다. 지영은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탈색하여 주황, 노란 머리가 된다.(이때 염색하면서 지영이 티티에게도 염색약을 바르는데 실제 염색약을 발랐든, 가짜 염색약을 발랐든 동물의 털을 염색하지 마라, 동물학대하는 이미지를 무비판적으로 재현하지마라. 동물학대입니다) 지영이 어떻게든 돈을 버는 직장을 구해보려 하지만,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를 받아주는 직장은 없다. 결국 지영은 파출부 노동을 하는 쪽방촌 이웃 아주머니를 통해 인천국제공항의 식당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노동하게 된다.
그림을 배우러 유학을 가고 싶다는 지영의 말에 고등학교 때 지영과 가장 단짝친구였던 혜주가 유학도 돈이 있어야 갈 수 있는거라고 나무란다. 혜주는 점심 사줄테니 언제든 자신의 직장 점심시간에 놀러오라고 툭 뱉듯 말하고, 지영은 그 말을 믿고 정말로 혜주의 직장 점심시간에 혜주의 회사 근처로 찾아간다. 그러나 혜주는 과중한 업무량으로 1시간 뒤에야 지영이 기다리고 있던 커피집에 도착하고, 지영은 이미 인천으로 가는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러니까 혜주는 우리 언제 한번 밥 한번 먹자고 말하고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사람이고, 지영은 그 말을 믿고 정말 밥을 함께 먹을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관계 안에서 정말 밥을 함께 먹을거라고 믿는 사람은 상처 받겠지.
지영은 집에 굴러다니는 흔하디 흔한 볼펜으로 흐드러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지영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그림들이 피어난다. 혜주의 생일 때 지영은 선물상자의 무늬를 하나하나 다 손으로 그렸다. 그걸 들여다봐주고 알아봐준 사람은 혜주가 아닌 태희였다. 태희(배두나 역)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태희의 아빠는 태희가 봉사활동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면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밥시간도 안지키고 그런 사람은 밥먹을 자격이 없다, 밥먹지 말고 굶어’라는 말로 일갈한다. 태희의 아빠는 말로 사람을 해치고 상처입히는 사람이다. 태희의 집은 찜징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태희에게 ‘가족’이라는 이유로 임금도 주지 않고 찜질방의 카운터를 보는 노동을 시킨다. 태희의 남동생에겐 공부해야 한다며 카운터보는 노동 안시킨다. 태희도 자기 삶있고 자기만의 시간 필요한대요. 여자도 자기 삶있고, 자기만의 시간 필요한대요. 가족은 역시 정신병자 배양실이다. 가족이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을 삐뚤어지고 뒤틀리게 만든다. 태희는 지영과 함께 부모님이 운영하는 찜질방 홍보 전단을 인천국제여객터미널에서 나눠준다. 어딘가로 바쁘게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바닥에 떨어진 찜질방 전단이 짓밟힌다.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그 전단이 꼭 태희와 지영 같았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걸까”
비류와 온조는 쌍둥이 자매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중국인이다. 이들의 조부모는 한국으로 귀화한 화교 1세대이다. 이주민 3세대인 비류와 온조는 1세대인 할머니, 할아버지와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중국말을 하면 비류와 온조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비류와 온조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인천의 중국인 거리, 차이나 타운에 산다. 현재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인천에는 많은 외국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비류와 온조의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귀화한 외국인일 수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인들이 종사하지 않는 힘든 노동을 외주하기도 한다. 우리의 세계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은폐된 노동에 의해 지탱되고 굴러가고 있다. 비류와 온조의 존재는 한민족 한국인이라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인은 정말 한민족인가? 이들은 동일한 한국이라고 믿어지는 동질성에 혼종성을 드러낸다.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인천이 지닌 교란성, 잡종성을 보여준다. 인간들은 인간의 수요에 의해 수입해온 비인간동물들을 생태교란종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지구에서 제일 생태교란종은 인간이잖아. 지구 제일 생태교란종인 주제에 수요에 의해 물건처럼 거래한 동물들을 생태교란종이라고 부르다니 인간동물은 정말 양심없고 이기적이다.
서울의 일자리의 양상과, 인천의 일자리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서울이 빌딩 안의 정장을 입은 사무직이라면, 인천은 작업복을 입은 육체노동자들이 거주한다. 태희가 전단을 나눠주기 위해 들어간 선원 모집소에는 아시아계 외국인 선원노동자들이 가득하다. 태희는 마치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하듯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찜질방의 전단을 나눠준다. 아마 태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외국인들에게는 전단을 나눠주지 않았겠지. 실제로 선원 모집소 운영자인 한국인 남성은 태희에게 ‘여기 찜질방 갈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다른 곳에 가봐요’라고 말한다. 태희가 선원 모집소 운영자에게 자신도 선원이 되고 싶다고 하자 선원 모집소 운영자는 웃으면서 “여기 유람선 타는데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태희 역시 “저 유람선 타려는거 아니에요”라고 말하지만 선원 모집소 운영자의 귀에 선원이 되고 싶다는 여성의 말이, 목소리가 들리겠는가. 걔들은 귀가 달려있어도 여성의 꿈에 대해서 못 듣는다. (선원이 별로 낭만적인 노동이 아니라 착취적인 노동이라는 것까지 구구절절 다 쓰면 너무 길어지므로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성도 선원이 될 수 있는 세계 절대 만들테니까. 여자도 망망대해를 배를 타고 가로지르는 꿈을 꿀 수 있다. 바다는 남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식민화하야 착취해야할 공간도 아니다.(이미 바다를 식민화하여 착취하고 있지만)
태희는 “어떤 곳이든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답답해. 계속 배를 타고 그 어디서도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 다니면서 사는거야. 이렇게 배 안에 누워서 지나가는 구름도 보고, 책도 읽고.”라고 말한다. 배를 타는 것이 정말 낭만적인 것인지와는 별개로 태희의 꿈은 아름답고 반짝반짝 빛난다. 태희의 꿈은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과거의 집시나 히피처럼 유랑자, 방랑자, 길이나 물 위의 모험가가 되는 것이다. 태희는 뜨개같고, 바느질 같다. 태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돌보고, 이어붙이고, 수선한다. 태희는 친구들을 소집하여 약속을 잡는 역할을 한다. 꼭 여럿이 있는 관계 안에서 관계를 정리하고, 조율하고 중재하는 돌봄노동자가 있지 않은가. 태희는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을 수행한다. 이를테면 친구와 친구가 싸우면, 너희들 왜 그래, 뫄뫄가 솨솨한테 사과해, 라고 한다던지. 또 감정이 다친 친구를 찾아가서 마음을 안아주고 풀어주는 노동들까지. 직장생활, 사회생활에서 받은 상처를 토로하는 혜주의 전화를 늘 받아주는 것도 태희이고, 지영의 집을 찾아가 지영과 함께 무허가 판자촌 거리를 함께 걸어주는 것도 태희이다. 정작 혜주는 태희가 전화했을 때 직장에서 일하느라 끊기 일수지만. 누군가는 혜주를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나도 실제로 조금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는 직장 외의 인간관계를 돌볼 시간이 없다. 인간관계, 친구들과의 만남, 놀이 그런 것도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시간도 생긴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다. 휴일도, 휴가도, 휴양도 돈이 있어야 갈 수 있고, 할 수 있다. 돈없는 사람한테는 빨간날이 없다. 빨간날이 빨간날이 아니다. 남들 다 쉬는 빨간날에도 어떤 노동자는 일터로 출근한다.
혜주는 친구들과의 모임날, 친구들을 서울로 오라고 한다. 태희와 지영, 비류, 온조 모두 인천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4명이 인천에 있는데 우리 4명이 서울에 가는게 낫니, 너 한명이 인천으로 오는게 낫니’라는 물음에 혜주는 ‘당연히 너희 4명이 서울로 오는게 낫지’라고 답한다. 이럴 때 혜주는 서울중심주의를 상징한다. 서울은 마치 이누야사에 나오는 미륵의 풍혈처럼 자원, 인력, 문화 등 모든 것을 서울로 빨아들인다. 이 5인방은 결국 인천에서 만났다가, 서울의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이동한다. 서울로 이동하기전, 인천에서 태희가 데려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고 혜주는 ‘공돌이들이랑 뭘 놀아’라고 말한다.(지영이는 공장에서 노동하던 ‘공순이’, 여공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혜주에게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공돌이’인 것이다. 혜주가 직장에서 사람이 아닌 ‘젊고 어린 여직원’인 것처럼. 노동자가 노동자를 혐오하는 것이다. 인천에서 버스를 통해 서울로 이동하면서 창문 바깥의 풍경은 인천의 공장지대에서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 서울의 풍경으로 변모해간다. 서울로 갈수록 창문 바깥이 불빛으로 반짝거린다. 이 5인방은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비보잉 춤을 구경한다. 질적, 양적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도 서울거주자의 특권이다. 인천에서 서울로 바뀌어가는 창문 바깥의 풍경은 공간의 경제적 계급의 지형, 지리를 보여준다.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은 지영이와 같은 빈곤계층이 배제되는 공간이다. 혜주는 직장에서 번 돈으로 동대문에서 옷을 마구 산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시발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다. 모험가가 되고 싶은 태희는 칼가게에서 주머니칼을 산다. 빈곤한 지영은 거기 있는 것 그 어느 것도 살 수 없다. 지영은 각자 마음에 드는 가게 앞에 멈춰서 물건을 사고 있는 친구들을 뒤에 두고 동대문 상가 밖으로 혼자 걸어나간다. 왜 아픈 사람은 더 아파야 할까? 왜 슬픈 사람은 더 슬퍼야 할까? 왜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까?
무너지는 집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는 붕괴이겠지. 지영이 친구집에서 외박을 하고 돌아온 다음날 천장이 무너져 내려가던 집이 무너져 집 안에 있던 지영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망한다. 지영은 고아가 된다. 지영은 집이 없어진다. 무너지는 집도 집이라고 집이었는데 정말 끝끝내 무너져서 없어져 버렸어. 지영은 붕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고양이 티티를 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킨다. 장례식도 돈이 없어서 제일 싼 장례식장에서 값싼 장례를 치룬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가난하다. 그때 장례식장으로 경찰이 들이닥친다. 사망자의 친족이 지영뿐이어서 참고인 조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지영을 경찰서로 데리고 간다. 지영은 경찰서로 소환되기 전에 고양이 티티를 태희에게 맞긴다. 경찰은 지영에게 ‘네가 원하던대로 노인네들 죽으니까 좋지?’라고 막말을 한다.(경찰 대가리 도끼로 두동강 내버리자!) 그 말은 들은 지영은 경찰이 준 국밥을 엎어버린다. 지영은 경찰서에서 정당한 분노를 표한 대가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태희는 찾아간다, 지영을. 지영을 찾아서 경찰서도 가고, 지영이 수감된 분류심사원도 간다. 태희가 분류심사원에 수감되어 있는 지영에게 ‘이런데서 지내는거 답답하지 않아? 얼른 나와’ ‘지영아 나는 니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해도 니편이야. 나 너, 믿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 라고 말하자, 지영은 ‘나가도 갈 곳이 없어’라고 답한다. 지영한테는 무너지는 집과 무너지는 집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없어. 한때 지영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혜주는 지영이 교도소에 수감된 것을 전해듣고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혜주는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할 때 지하철에서 진동하는 돼지갈비 냄새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돼지갈비는 노동자들이 먹는 값싼 음식이어서 인천 노동자들의 몸에 벤 냄새여서 그렇겠지? 감독은 시각 이미지 뿐만 아니라, 후각 텍스트를 통해서도 가난을 조명한다. 인천 지하철의 돼지갈비 냄새는 인천이 지닌 계급성을 상징한다. 돼지갈비는 빈곤을 표상하는 장치이지만, 이것이 동물에 대한 폭력이고, 동물착취임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이 시대와(2001년) 이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영화들이 그러할 것이다.
지영과 태희는 인천의 거리를 걷다가 여성 노숙인을 만난다. 태희는 여성 노숙인을 보고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떠돌면서 살고 싶다, (여성 노숙인이) 궁금해서 따라가고 싶다’고 낭만화/타자화하여 말하고, 태희보다 더 여성 노숙인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지영은 ‘(그걸) 자유라고 그러니. 그렇게 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거리에서 성폭력을 당하면 어떡해)’ 라고 말한다. 또 나도 미래에 집없이 거리를 떠돌게 될까봐 무섭다고도 말했다. 나도 가끔 지하철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몇호선 ‘미친년’을 보고 나도 미래에 저렇게 될까봐 두려웠던 적이 자주 있다. 그래서 지영의 말이 너무 공감되었다. 여성은 밤거리에서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밤거리에서 아무도 없는 버스장류장에 앉아있으면, 모르는 차가 서서 창문을 내리고 자기 집에 가서 자자고 한다. 도망가면 차에서 내려서 따라온다. 그걸 피하려면 24시간 빌딩의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닫고 선잠을 자야한다. 그건 낭만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찌린내가 올라오는 여자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서 불편하게 잠드는 건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다. 어쩌면 여성 노숙인은 지영과 태희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무너지는 집에 사는 사람은 눈 앞에서 지울 수 없는 빈곤의 폭력을 보고, 집과 가족이 감옥인 사람은 가정으로부터의 이탈, 탈주를 꿈꾼다. 낭만을 언제나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겠다. 나도 낭만을 좋아하니까. 태희는 책과 나침반, 어두운 곳에서도 책에 불빛을 비출 수 있는 머리띠 전등, 여권을 여행가방에 챙겨넣는다. 집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가족사진에서 동대문에서 산 나이프로 자신의 얼굴을 오려내고는 집을 나온다. 지금까지 카운터에서 무상으로 일했던 분의 돈을 훔쳐서. 이제 가족사진에서 태희(유목하는 몸, 움직이는 뿌리)는 하얀 빈 공간으로 남는다. 고양이 티티를 비류와 온조(정주하는 몸)에게 맡기고, 소년원에서 출소하는 지영을 만나러 간다.
여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다. 여권을 발급 받으려면 몇주 전에 미리 신청을 해야하고, 무엇보다 해외에 나갈 미래가 있는 사람들만 발급받는 것이다. 해외에 나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해외는 고사하고 한국에서 있을 집조차 없는 사람 사이의 간격을 가늠해본다. 지영은 과연 여권이 있을까? 이 이야기가 동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성 노숙인에게서 자유를 보는 사람과, 빈곤의 폭력을 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싸우고 불화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미래에 또 틀림없이 빈곤의 그늘이 드리워지겠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끝나니까 해피엔딩이기도 하고,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새드엔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영에게 ‘나 여기를 떠날거야, 어디로든. 혼자보다는 너랑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랑 같이 떠날래?’ 라고 말하는 이 여자 어떻게 안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럼 지금까지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것, 내가 이전의 글에서 누락한 것을 이야기해야할 시간이다. 길고양이 티티는 동거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강제이주를 당하는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지영은 자신이 돌보던 고양이를 혜주의 생일선물로 ‘지불’하고, 고양이가 키우기 어렵다는 혜주에게 ‘환불’ 당한다. 여기서 티티의 동물권, 주거권, 행복추구권, 의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티티의 강제이주는 혜주와 지영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영이 교도소에 수감되자, 티티는 또 타존재인 태희에게 맡겨진다. 태희는 티티를 집의 지하실에 풀어둔다. 태희가 집을 나가며, 비류와 온조에게 티티를 맡기는데 그 지난한 과정에서 티티가 받았을 고통은 누가 책임지는가? 티티는 주변부의 여성들의 비유물로 유기당함과 강제이주를 반복해서 겪는다. 설령 그것이 실제상황이 아닌 예술적 재현이라고 해도 그것이 동물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건 예술이 아니라, 동물학대다’라는 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희가 고양이 티티를 비류와 온조에게 맡기기 전, 비류와 온조는 길고양이 보호소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보도를 듣는다. 그런데 보도는 길고양이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않아, 길고양이가 동족인 길고양이를 잡아먹는 재난을 동물학대에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길고양이의 야생성이 극단에 이르렀다고 길고양이 혐오를 조장하는 동물혐오적 보도를 한다. 북극곰이 기후위기로 먹을 것이 없어 동족인 북극곰의 시체를 뜯어먹는 것은 야생성의 극단이 아니라, 인간의 생태교란이자,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다. 비인간동물이 동족 비인간동물을 먹는 것은 수용시설에 가둬놓고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일어난 참사이고,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인간이 일으킨 재난이다. 고양이들에게 제 때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주었다면, 길고양이들은 서로 잡아먹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도 먹을 것이 없으면 같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동족의 몸을 먹는 것은 동물이 지닌 야생성, ‘야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폭력상황에서 벌어지는 재난이다. 이 단락은 비단 ‘고양이를 부탁해’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적 텍스트에 해당하는 단락이다. 아마 내가 2001년에 문학작품을 썼다면 비슷하게 동물사체가 나오는 글을 썼겠지. 동물학대 장면을 마구 작품의 서사적 장치로 동원했겠지. 과거에 말해지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것처럼, 우리는 더 많은 텍스트들을 동물권적 관점에 입각하여 재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비인간동물에게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로 존재해온 인간의 책임일 것이다. 비인간동물들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이 그 언어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자됨을 인지하고 영원히 죄책감을 지고 살면서 책임을 지는 것은 *‘불가피하게 불순한 자원으로부터 미래를 만들어내는 어려운 노동’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 우리의 예술은 순결하지 않고 불순하고, 더럽고, 오염되어 있다. 여성을 착취하고, 퀴어를 착취하고, 성노동자를 착취하고, 비인간동물을 착취한다. 그 불순함과 더러움과 오염을 걷어내는 노동도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몫이다. 내가 똥같이 말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란다.
우리는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나이주의, 육식정상성으로 가득한 오염된 언어 속에서 저항과 연대의 언어를 찾는다. 정상상에서 끊임없이 이탈하고 미끄러지는 두 인간동물의 연결과 연대가 비인간동물들에게 까지 이어지는 날을 희망하고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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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 정말 담배가 피고 싶다. 배두나가 너무 담배를 맛있게 펴서 영화를 보면서 담배를 피고 싶다. 또 집에 가기 싫다. 목적지도, 종착지도 몰라도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그래서 집에 가기 싫었지만, 추워서 몸을 떨면서 집에 와서 이 글을 썼다. 다들 고양이를 부탁해가 내리기 전에 봐줘!
*전혜은님의 퀴어이론 산책하기 강연에서 들었다. 다들 퀴어이론 산책하기 많은 구매 부탁
전혜은, (2021), 『퀴어이론 산책하기』,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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